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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프로필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나이 부인 아내 가족 자녀 치매 고향 학력 군대 종교

노란 돌고래 2025. 4. 15. 15:34
김문수 프로필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나이 부인 아내 가족 자녀 치매 고향 학력 군대 종교

 

 

프로필

 

나이 : 1951년 9월 27일 출생. 73세

고향 :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집 거주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가족 : 아버지 김승헌, 어머니 조순조, 형 김명수 김영수, 남동생 김익수, 누나 김성수 김숙랑 김갑출, 부인 설난영, 자녀 딸 김동주

학력 : 영천국민학교 졸업 - 경북중학교 졸업 - 경북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 학사

신체 : 175센치, 62키로, O형

군대 : 제2국민역(중이 근치술 후유증)

종교 : 개신교

소속 정당 : 국민의힘

 

 

 

 

약력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민중당 노동위원장 - 민중당 구로구 갑 지구당위원장 -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 부천시 소사구 지구당위원장 - 노동부 행정규제완화위원회 위원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 제15대 국회의원 (경기 부천시 소사구 / 신한국당) - 제16대 국회의원 (경기 부천시 소사구 / 한나라당) -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 대한민국 국회 민생정치연구회 회장 - 한나라당 원내부총무 - 한나라당 노동위원회 위원장 - 제17대 국회의원 (경기 부천시 소사구 / 한나라당) - 제32·33대 경기도지사 (민선 4·5기 / 한나라당) -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후보 -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 -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 -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 자유통일당 대표 - 자유공화당 공동대표 - 기독자유통일당 21대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 제13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윤석열 정부) - 제10대 고용노동부장관 (윤석열 정부)

 

 

 

 

본디 매우 유명한 운동권 지도자 출신이었다. 사실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활동한, 그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전설이다.

 

 

 

 

그 시절 노동운동가들 대다수가 김문수를 따르거나, 혹은 김문수가 이끌던 조직과 깊게 연계되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김문수는 노동운동계의 김근태라고 볼 만큼 절대적인 인물이었고, 수많은 노동운동 후배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1학년 때 훗날 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되는 5년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서울대 학생운동 서클 중 하나였던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2학년 때 김근태에 의해 공활을 경험하고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김문수는 7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병행했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당시 진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 후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80년대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그의 얼굴 한번 못 본 신인급 노동운동가 청년들도 입소문으로 퍼진 '노동투쟁 신화 김문수'의 파란만장한 전설들을 들으며 존경했다고 하니 그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제적 후 스스로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밑바닥부터 노동운동을 한 인물이다.

 

 

 

 

본격적으로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시작되는 시기가 1980년대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 특히 노동운동계에 뛰어든 20대 젊은이들에게 김문수는 절대적인 전설이었다. 당시 김문수의 연설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필본이 돌아다니곤 했다고 하는데, 그 연설을 못 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필본을 돌려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경우들도 흔히 있었다고 할 정도.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설립에 기여했는데, 1986년 서노련(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서 인천 5.3 운동 당시 5.3 직선제 개헌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 당시 10.28 건국대학교 항쟁으로 애학투련 학생 2천 명 이상이 잡혀 들어와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많은 주체사상파들이 자신에게 찾아와 "위수김동"을 이야기하며 함께 할 것을 설득했지만 당시 자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주의에 빠져있었을지언정 주체사상에는 동참하지 않았다고 한다.

 

 

 

 

1986년 부터 1988년까지 복역 중이던 동안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이 심상정이었다. 심상정의 결혼을 주선해 준 사람도 김문수였고 김문수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심상정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유시민 작가와 티비 토론을 하러 나와서 과거 서로를 동지로서 보호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덕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이 시절 안기부에서 고초를 겪은 이야기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최민희 의원의 연설 중에 짤막하게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항쟁 이후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면서 현실정치에 투신, 이재오, 장기표, 이우재 등과 손을 잡고 재야민주화운동 세력, 노동운동 세력 일부를 모아서 1990년에 민중당을 창당하고 본인은 공장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 때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해산되면서 말 그대로 물을 먹었다. 그리고 같은 해 14대 대선에서 재야를 비롯한 비 김대중-김영삼 계열의 민주화운동 추진 진영에서 민중 후보로 추대했던 무소속 백기완도 1%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며 낙선했다.

 

 

 

 

 

백기완의 낙선과 함석헌의 죽음이 김문수의 민주화운동 포기 및 전향 선언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이 시점부터 진보 진영의 인사들과도 척을 지며 본격적으로 김문수에게 가장 흔히 쓰이는 별명 중 하나인 변절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또한 이 때 백기완과의 악연이 김문수가 민자당에 들어가는 계기로 지목되기도 한다. 민중당의 실패 이후 1년간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1994년 김영삼에게 영입되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우익으로 전향한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박규식 후보, 김대중의 측근인 새정치국민회의 박지원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7대 총선 앞두고는 최병렬 당시 당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가결을 책임지고 사퇴해 치러진 전당대회에 당대표 경선에 출사표를 냈지만, 당선자인 박근혜, 2위를 기록한 홍사덕에게 밀린 3위를 기록하였고, 제17대 국회 개원 앞두고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상도동계 서울 서초구 을 5선 중진인 김덕룡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하여 17대 국회의원직은 사퇴하였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하며 경기도지사 임기는 재선에서 마감하게 됐고, 8년간의 도정 활동을 마쳤다. 대신 같은 당의 남경필 후보를 지지하며 당 차원에서 활동을 벌여갔다. 한편 7월 30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경기도 지역 의석 수가 2자리나 있다 보니 김문수가 도지사 3선 대신 해당 지역구 재보궐선거에 출마해서 국회 복귀를 노릴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지만, 선거법 상 경기도 지역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를 위해서는 선거 120일 전에 지사직을 사퇴해야 했는데 최종적으로 사퇴하지 않아 무산됐다. 이후 정몽준의 서울특별시장 출마로 인해 치러지게 될 동작구 을 재보궐선거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본인이 직접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도지사 임기 종료 후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며,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2014년 10월에 중국 정부에 직접 초청을 받고 한중 반부패 연대 결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5년 6월,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며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는 더민주의 다크호스 김부겸 전 의원과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후 2015년 8월 새누리당의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됐고, 동시에 기존 경기도 자택을 처분하고 수성구 시지동에 아파트를 마련해 입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정대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한구 현직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대구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해당 지역구에서 오랫동안 지역주의에 맞서 도전해 온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고 만다. 심지어 이는 무소속이나 기타 정당 후보도 없는 1:1 대결에서 37.69% : 62.30% 로 무려 득표율 24.61%p, 득표 수 33,536표 차 대패로 낙선하며 김부겸에게는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최초의 민주당계 대경권 소속 국회의원이라는 영예를 안겨주면서 김문수의 입장에서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사실상 근황도 잘 안 잡힌다. 정부 출범하자마자 친박 집회 참석해서 "문재인 정부 타도"를 외쳤다는 것만 근근히 보도되곤 한다. 2018년 1월 8일, 조갑제 TV와의 인터뷰에선 문재인에게 정신이상자라는 막말까지 곁들여 여전한 디스를 했다.

 

 

 

 

4월 11일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공식 출마 선언을 하였다. 동시에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더 이상 대구에서 정치를 할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이후 20대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을 지지하면서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촉구했으며, 8회 지선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의 유세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에는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급 대통령자문위원장인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 같은 해 9월 29일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문수는 중립을 요구하는 공직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이후도 종교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23년 4월 11일에도 김문수는 우파 성향 종교인인 전광훈의 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공직자로서의 종교적 중립성 요구 원칙을 위반 행위를 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 이튿날인 4월 12일에는 기독교입국론을 주장하며 한기총 두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와 다른 견해를 내세운 것에 있어, 여성가족부을 폐지하지 말고 저출생 대응 강화를 위해 격상하자고 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24년 7월 31일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며 경사노위 위원장직을 내려놓았고, 후임 경사노위 위원장은 권기섭 전 고용노동부차관이 임명되었다.

 

 

 

 

고용노동부장관 취임 직후 첫 번째 업무지시로 임금체불 전액 청산과 체불사업주 엄벌을 지시하였다. 2025년 들어 보수진영의 유력 대권주자로 주목받고 있다. 2025년 1월 8일 기준, 범보수 차기 대권 주자 중 선호도 1위를 차지하였다.

 

 

 

 

 

2025년 1월 23일 기준, 조기대선 '김문수 vs 이재명' 양자대결에서 오차 범위 내에서 앞서는 모습을 보였다. 여론조사마다 보수 후보들 중에서는 가장 압도적인 수치를 보이고 있음에도 정작 본인은 2월 10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회동한 것 외에는 별다른 대권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4월 8일에 제21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국무회의에서 사의를 표했고, 같은 날 오후 3시에 정부세종청사에서 이임식을 갖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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