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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정윤희 나이 남편 조규영 근황 프로필 아들 자녀 최근 모습 얼굴 고향 종교

by 노란 돌고래 2025. 3. 27.
영화배우 정윤희 나이 남편 조규영 근황 프로필 아들 자녀 최근 모습 얼굴 고향 종교

 

 

프로필

 

나이 : 1954년 6월 4일 출생. 70세

고향 : 경상남도 통영시

가족 : 남편 조규영, 장녀 조윤경(1983년생), 장남 조융우(1985년생), 차남 조용민(1989~2011)

학력 : 당감국민학교 졸업 - 혜화여자중학교 졸업 - 혜화여자고등학교 졸업

신체 : 158센치, 48키로, O형

데뷔 : 1975년 영화 <욕망>

종교 :천주교

 

 

 

 

대한민국의 여배우로 장미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말도 종종 들었고, 국외에도 유명해서 그녀가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 영화인 한 사람이 '일본 일류 여배우 100명을 합쳐도 정윤희의 매력엔 못 당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른 트로이카 일원보다도 외모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로도 유명하다. 트로이카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로 당시 많은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다보니 관능적인 배역을 맡는 일이 많아 반 섹스심벌 정도로 대우하는 일이 흔했다. 남성팬들 사이에서는 유지인과 더불어 '누가 더 미인인가'라는 주제로 설전을 자주 벌이곤 했다.

 

 

 

 

1954년생으로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혜화여고 시절 정윤희는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정윤희의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친구와 같이 대학 응시를 했다. 그러나 친구는 S대 음대에 붙었지만 정윤희는 떨어졌다고. 그 친구에게 경쟁심을 가진 정윤희는 그 친구의 1년 후배가 되기 싫어 미술로 전공을 바꾸었다.

 

 

 

 

주로 명동 일대에서 활동하며 서울 말씨를 익혔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정윤희는 부산 미니스커트충무시 의문의 1패로 불리며 그 일대에서 외모로 유명했다고 한다. 미술을 지망했던 정윤희였지만 당시 생활비가 부족했고, 또 그녀의 외모가 전국구임을 알게 된 정윤희는 배우로 장래희망을 바꾼다.

 

 

 

 

그래서 그녀가 첫번째로 오디션에 응시한 영화가 1974년 최고 흥행 영화로 유명한 별들의 고향. 그러나 배우 경험이 없던 정윤희였기에 여주인공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정윤희 대신 안인숙이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된다.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는데 원래는 1974년에 바보들의 행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데뷔작인 욕망은 데뷔작이라고는 하지만 영화 크레딧에 정윤희의 이름도 빠져있고 흥행조차 실패하며 또 하나의 무명 여배우로 남나 싶었으나 정윤희는 2번째로 영화 출연 기회를 맞이한다. 김지미, 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원래 신인 여배우 강경희가 맡기로 한 자리였으나 강경희가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어 그 자리에 정윤희가 대신 들어간 것이었다. 비록 청춘극장은 거하게 실패해 버렸지만, 이전의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맡았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녀의 지명도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제과의 전속모델이었던 양정화도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며 계약이 파기당했는데 정윤희가 이 해태제과의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박동명 사건으로 인해 얻은 반사혜택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청춘극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거대 방송사였던 동양방송과 전속 계약을 맺어 활약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정윤희는 동양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인 쇼쇼쇼의 2대 MC를 맡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 더블 MC였는데, 정윤희의 파트너는 동양방송 전속가수였던 위키리(본명 이한필)였으며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윤희는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실홍실에서 정윤희는 부잣집 여대생역을 맡아서 여주인공 장미희와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드라마에 나온 정윤희의 세련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그 해에 가장 예쁜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다.

 

 

 

 

한편, 영화에서는 얄개 시리즈에서 나두수의 누나인 나두주 역으로 출연하며 우스꽝스런 이미지를 소화한다. 나두수가 나두주의 얼굴에 낙서한 장면이 유명하다.

 

 

 

 

1978년에는 당시 붐을 이루던 호스티스 소재 영화인 나는 77번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흥행 성공을 이끌어냈고, 이때부터 여배우 트로이카의 1인으로 영화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가수로 데뷔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까지만 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까이기도 종종 까였으며, 그 때문에 ‘말뚝’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정윤희는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1979년에는 유지인과 더불어 영화 실적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사랑이 깊어질 때, 가을비 우산속에, 우요일,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출연했고 이 중에서 사랑이 깊어질 때랑 우요일을 제외하고 무려 1년 만에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기록은 지금도 보기가 힘들다. 한편, 같은 해인 1979년에 '야 곰례야' 등 동양방송 드라마들의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정윤희는 순박한 시골 처녀역을 소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MBC로도 출연 범위를 넓히며 드라마에서도 계속 활동을 하는 한편 노출 빈도가 있는 호스티스 소재 영화들부터 ‘사랑하는 사람아’ 같은 멜로물을 오가며 계속 해서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특히, 1981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하며 동양방송을 이은 KBS에서 MBC로 정윤희가 드라마 출연 범위를 넓힌 일은, 그때까지 공고히 유지되고 있던 방송사 전속 탤런트 제도가 붕괴되는 시초가 되었다.

 

 

 

 

19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영화에 가득 표현해 내는 한편 여우주연상까지 타내며 연기력 면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토속적인 주제를 다룬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또 다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82년에 성공한 영화로는 여자의 함정이 있다. 애마부인 다음으로 흥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연속극에서는 코믹연속극 세자매의 막내딸로 출연하여 정동환과 호흡을 맞추었다. 연속극 고백에서는 기존의 연약한 여성상이 아닌 강한 여성상을 보여줬다. 드라마에선 발랄한 젊은 여성 역을 맡은 일이 많았으며 CF쪽의 이미지도 이런 드라마쪽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 정석적인 최루성 멜로물의 여주인공 역도 자주 맡았다.

 

 

 

 

한데 영화 쪽에선 남자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역할이라 해야할지, 미모 자체가 죄가 되어 주변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어 휘둘리며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역을 맡은 일이 많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당시 영화계 분위기가 노출 장면이 빠지지 않던 분위기여서 출연한 영화에서 노출 장면을 보인 일도 자주 있다.

 

 

 

 

예쁜 여자들만 모아놓은 여배우들 중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 덕에 시대에 기록되는 미녀 여배우가 있다. 정윤희 이전에는 김지미가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원미경, 황신혜, 김희선, 김태희, 한가인, 손예진, 송혜교, 전지현 등이 미녀 여배우의 뒤를 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윤희-황신혜-김희선-김태희"가 ‘역대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 계보’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정윤희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여배우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미녀 여배우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여배우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나 드라마에서만 성공한 미녀 여배우로는 김희선, 김태희 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 쪽으로는 뚜렷한 성과가 없지만, 정윤희는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둔 여배우이다.김태희의 경우에는 전성기 시절에는 인기있는 여배우 중 하나였지만,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을 누를 정도의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다. 정윤희는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에 유지인, 장미희와 함께 트로이카로서 인기를 아주 크게 누렸다.

 

 

 

 

임예진 같은 경우는 하이틴 영화에서의 활약은 두드려졌지만 외모면에서도 정윤희와 비교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임예진은 성인 이후에는 흥행작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정윤희와 비교하기엔 약하다. 이런 정윤희와 비교해서 외모와 인기 모두 평가를 받는 여배우로는 정윤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장미희와 유지인, 90년대 후반을 장악했던 1990년대 대표 미녀 배우 김희선이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성적면에서 원미경이 영화와 드라마, CF 모두에서 정윤희와 어느 정도 대결을 할 만했다.

 

 

 

 

1984년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조 회장은 당시 유부남이라 불륜인데, 당시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해서 처벌받았다. 그 이후 1984년 12월 회장이 전 부인과 갈라서고, 정윤희와 재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 채 방송 출연을 한사코 거절해왔으나, 1993년 남편 회사 중앙산업의 브랜드 '하이츠'의 TV광고 모델로 활동했고 1995년 8월 23일 SBS <깊은밤 전영호쇼>에서 전화 인터뷰 형식으로 근황을 전했다. 그 외에 2001년 한국영상자료원 행사 '한국 영화배우 열전'을 통해 대중 앞에 모습을 한 번이나마 드러내기도 했다.

 

 

 

 

2011년 아들의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정지 사망으로 화제가 되어 뉴스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았고, 언론의 추적을 받았다. 집안 사업도 어려워졌는지 서울의 26억 상당의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경기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해 9월 13일 MBC에서 추석특집 프로그램 <카페 정윤희>가 방영될 당시 팬들은 그녀의 출연을 기대했으나, 결국 모습을 안 드러내고 편지와 꽃으로 대신했다.

 

 

 

 

2013년 나이 60이 된 정윤희의 근황이 포착되었다.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입고 다닌다고. 그런데 결혼 초창기에는 경제 관념이 없어서 막 쓰기만 했다가 시댁 식구들한테 혼나기도 했다는 이야기 루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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