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원주 사망 나이 근황 며느리 아들 남편 가족 프로필 탤런트
배우 겸 탤런트 전원주는 1960년 CBS 공채 5기, 1963년 연극배우로 데뷔하였으며, 같은 해 DBS 1기 성우로 공채되었다. 성우로 활동하던 전원주는 연기자로 전업을 하였고, 여러 다양한 드라마 속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선보여 임팩트를 남겼다. 최근까지도 여러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방송 근황을 전하고 있는 전원주인데 얼마전 사망했다는 잘못된 루머가 번져 혼동을 야기시키도 했다.
프로필
나이 : 1939년 9월 20일 출생. 85세
고향 : 경기도 개성부(현 개성시)
가족 : 남편 임진호(2013년 사별), 아들 2
학력 : 만월국민학교 중퇴 - 정화여자중학교 졸업 - 덕성여자고등학교 졸업 - 숙명여자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 학사
신체 : 150센치, 51키로, AB형
데뷔 : 1960년 CBS 성우극회 공채 성우 5기
종교 : 불교(법명: 대원행)
1939년 9월 20일 경기도 개성부에서 대규모로 인삼농사를 경영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50년 6.25 전쟁으로 식구들이 남한으로 전부 피난을 오게 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한동안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이 당시에 이주한 지역이 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이었다.
이후 개성에서 국민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피난 생활을 하느라 결국 국민학교 졸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가정 형편이 재차 호전된 시점에 마침내 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였는데 처음에는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에게 사정을 한 끝에 가까스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열심히 배웠던 덕분에 졸업식 때에는 상장까지 수여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고, 피난 오느라 학업이 끊긴 전원주의 공부에도 신경을 써서,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여담으로 전원주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오히려 어머니가 배우를 해야할 정도로 기품이 있는 미인이었는데 이를 보면 전원주는 어머니 쪽이 아닌 아버지 쪽을 빼닮은 것으로 추측된다.
전원주의 학창 시절인 1950년대 말의 대학진학률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매우 낮았다. 대학 가는 것 자체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시절인데, 더구나 남녀차별도 심했던 시절이라서 여자의 대학진학률은 남자에 비해 훨씬 낮았다. 이 시대 여자들은 대학이나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딸을 대학까지 보내는 집은 부잣집이었거나 시대를 앞서가는 깨인 집이었다. 당시 옥천군 최고의 부잣집 딸이었던 육영수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까지만 졸업했는데 많이 배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 경력으로 고향에서 교사로 일했을 정도다. 그리고 대학교 졸업 후 국교사로 근무하다가 1960년 성우로 데뷔했으며, 1972년 배우로 전직해 데뷔하였다.
교사 시절의 전원주는 원래 이전부터 배우에 뜻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교사로 일하던 시절 키가 너무 작아 칠판에 글씨를 쓰기가 힘들어 배우로 전직했다고 한 적이 있다. 웃자고 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것 때문에 꽤 스트레스도 받았던 듯 했다. 또 본인이 직접 밝힌 이유로는, 훈육주임이 여학생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차례로 뺨을 때리다가 끝에 서있던 작은 키의 전원주까지 학생인 줄 알고 뺨을 때려 기절까지 했다고. 요즘 같으면 아무리 작아도 어떻게 학생과 교사를 구별 못 하냐고 하겠지만, 당시는 여교사들도 학생 교복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다녔기에 더 헷갈리기 쉬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교사를 그만두고 성우로 전직했다고 한다.
성우시절의 전원주는 1960년 CBS 5기로 입사했다가 1963년 DBS 1기로 재입사하였다. 이후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KBS 6기로 분류되었다. 성우 시절에는 비중 있는 역할도 자주 맡는 등 잘 나갔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TV 보급률이 낮아서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TV 드라마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성우들의 인기가 높았다. 이 성우들이 1970년대 TV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TV와 영화로 넘어 왔기 때문에 성우 출신이거나, 후시 녹음을 하면서 성우 일을 해본 배우들이 원로배우들 중에서는 많은 편이다. 이순재, 김무생, 사미자 등이 제일 잘 알려졌지만, 양택조도 성우였었다.
배우가 되면서부터 오랜 기간 무명 생활을 겪었다. 당시 방송계에서는 너무 못 생겨서 곤란하다고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식모 역할만 꾸준히 주어졌다. 심지어 58세 때인 1996년에 한 드라마에서 외출 나온 군인들의 전투모를 벗겨가서 화대와 교환하자고 하는 매춘부 역을 맡기도 했다. 드라마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역시나 주인공 집안이 가난하다는 설정에 전원주는 주인공 어머니임에도 직업이 식모이거나 하는 식이었다. 젊은 날에는 교사 생활도 그만두면서 이런 대접을 받는 상황에 자존심이 상했던 듯. 그래서 하도 식모 역할을 해서 사모님 혹은 마님들이 입는 비단 치마를 입고 연기하는 것이 꿈이라고 안면 있는 PD들에게 하소연을 자주 했고, 이에 어느 날 한 PD에게서 출연 제안이 오면서 비단 치마를 입는 배역이라고 하여 신나서 출연하러 갔더니 무당 배역이었다고 한다.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본인이 직접 얘기한 내용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후반에 개그우먼 김미화의 추천으로, 배우 생활 처음으로 성인대상 심야 코미디 프로그램에 주요 구성원으로 출연하게 되는데, 코미디 세상만사의 코너 '사미인곡'에서의 부잣집 푼수 아줌마 역할이 그것이다. 거기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다음에 또 모이면 떼레뽕(텔레폰) 때려줘', '된장 뜨러 간다 된장 뜨러 가' 등의 유행어를 탄생시켜 재미있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게 되며, '전원주가 부잣집 마나님 역할을 해도 재미있을 수 있겠다'는 인식 또한 만들게 된다.
그리하여 데뷔 이래 처음으로 이슈 연예인이 되어, 점점 더 큰 인기를 가지게 된다. 이 때부터 광고도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고, 드라마에서의 출연 빈도수도 늘고, 역할도 부잣집 부인 역할도 점점 하게 된다. 그녀가 출연했던 인기 드라마들도 '요즘 인기 있는 전원주 덕을 봐서 더 잘 되었다'는 평가도 공공연하게 있었다. 대체로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 본인이 신혼 때부터 써 온 냄비를 아직까지 쓸 정도로 알뜰하다고 한다. 개성이 고향인 실향민 출신으로 어렸을 때 못 먹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다고 한다. 관련 글을 읽으려면 여기를 읽어보자. 전형적인 예전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시어머니에 일종의 아들바보라서 며느리들을 꽤 못마땅해한다. 다만 실제 방송에서 하는 말하고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엄청 못된 시어머니는 아니라고 하며 할건 다 해주는 타입이다.
한편 전원주는 28세에 부모님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했는데 영등포 일대에서 유명한 의사집안이었다고 한다. 첫 남편과 결혼한 지 2년만에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은 폐결핵으로 일찍이 작고했다.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가 다 의사였는데 남편을 병으로 잃은 것. 두번째 남편은 아들 하나를 가진 재혼남이었고 전원주는 아들들이 재혼 때문에 주눅들까봐 아들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두번째 남편은 난봉꾼으로 사업을 한다고 친가와 처갓집 돈을 탕진하고 여러 여자를 만나며 파주에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 부양은 전원주의 몫이었고 억척스럽게 살았다고 한다. 두번째 남편은 2013년 작고했는데 남편의 여자들이 장례식에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키웠으며 전원주는 일하느라 어머니 노릇을 못해서 아이들과 멀어졌었지만 2015년 여름 EBS 리얼극장에서 아들과 함께 7박8일 중국여행을 다녀오며 다시 가까워졌다.